가족이야기

동네 아이들은 도회지로 하나둘 떠나고

스티브황 2008. 6. 27. 08:48

50년대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하나둘씩 일자리를 찾아서 또는 공부하기 위하여 고향 시골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우리 사촌들 중에서 줄곳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고향을 떠나지 않은 분은 사촌인 윤철 형님밖에 없다. 지금은 창석이 형도 고향으로 돌아와서 한우 축산과 농사일을 병행하고 있지만 군대를 갔다와서 부산에서 잠시 택시운전을 하다 지금의 형수를 만나 결혼하고 나서 장남으로서 연로하신 부모님(둘째 큰아버지)을 모실 생각에 시골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우리 칠남매는 모두 고향을 떠났다. 지금 시골에는 산소에 모셔져 있는 아버지와 시골집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밖에 안 계신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창녕농고를 들어갔다가 도저히 맞지 않았고 이를 눈치체신 아버지께서 대전에 있는 공군기술고등학교에 가라고 하여 농고 1학년 2학기때부터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면서 공부를 하였다.

 

이 사건이 고향을 떠나게된 계기였다. 나도 남들처럼 도회지에서 공부를 하여 내 인생의 포부를 펴고 싶었으나 가정형편상 어쩌지 못하고 농고에 들어갔던 것이다. 가슴엔 항상 도회지에 나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도시를 동경하였다기 보다는 내 뜻을 펴기 위해서는 대도시에 나가 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슴속 눈물도 많이 흘렸고 심지어 집을 뛰쳐나가서 도시에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주경야독을 하고싶은 생각을 가진적도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내맘을 아버지께서 눈치를 채신 것이다. 순순히 2학기부터 농고에 가지말고 아버지께서 직접 학교에 가서 퇴교 처분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6개월후인 1973년 2월 2일 아버지께서 나를 데리고 가서 큰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고향을 떠났다. 난생 처음 대구를 구경하고 대구역에서 점심을 먹고, 또 난생 처음 고속버스를 탓다. 상냥한 고속버스 안내양이 사탕도 주고 지나는 지역마다 마이크를 들고 그 지역의 관광지와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그런 꿈같은 고속버스였다.

 

이후 나는 고향에서 한달 이상을 머물러 본 적이 없다. 그사이 사촌들,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도 하나둘 고향을 떠났다. 고향에 올수록 더욱더 황량해지고 더더욱 외로워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