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

어머니에게 진작에 딸이 있었으면...

스티브황 2011. 1. 17. 00:01

우리집은 7남내중 딸은 여섯째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어머니는 젊은 시절 다섯째까지 줄줄이 아들만 내리 낳던 시절 늘 딸을 원했다.

 

저녁이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과 반찬을 장만하시면서 저더리 방과 마루를 치우라고 하신다. 마루와 방을 쓸고 닦는 일은 거의 내 담당이었다. 난 그렇게라도 어머니를 도와드릴려고 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마루를 닦고 있는 나를 보시던 큰어머니께서 세째인 내가 딸이었으면 좋으련만...했었다.

 

그 이유를 몇십년이 흐른 지금에사 아하 그랬었구나~~딸이 일찍 없어서 얼마나 애닲팠을까... 

 

왜 그랬을까?  지금에는 소용없는 그런 쓸데없는 철이 그것도 이제사 드네... 그 시절 어머니는 하루에 잠을 4시간도 채 못 주무셨다. 게다가 낮잠 주무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잠을 주무실때는 아버지가 아무리 코를 고셔도 잘 주무신다.

 

아궁이 불을 때서 7남매의 세끼 밥을 해 먹이고, 포장도로가 없던 시절 밖에 갔다오면 난하게 노는 남자 형제들의 빨래거리를 한아름 다라이에 이고 뒷 냇가에 가서 씻어 오곤 하였다. 집에서 빨래하기엔 물이 없었다. 그래서 제발 옷 좀 깨끗이 입으로라고 입에 달고 계셨다. 그 피곤하셨을 빨래를 이제사 느끼다니...

 

농사철 농촌의 빨래거리는 매일 생긴다. 들일을 나갔다 오면 으례 옷을 다 베린다. 빨지 않을 수가 없다. 온통 흙 투성이가 되므로...보리베기와 양파캐기 철이 그렇고, 모내기 철이 그렇고, 논메기 철이 그렇고, 벼베기 철이 그렇고, 보리심기와 양파 심기 철 또한 그렇다. 매일 흙 투성이의 옷들이 쌓이고 쌓여서 어머니의 한숨이 되고 어머니의 고됨이 된다.

이때 과년한 딸이 있었으면 빨래거리를 분담해 주었을 텐데...

 

그 시절에 일하고 나면 흙 투성이 옷이 당연하고 그걸 빠시는 어머니의 역할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것도 모자라서 밭 메는 일, 양파와 마늘 심는 품앗이 일, 모내기 품앗이 등등등 잠시라도 않아 쉴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잠 인들 충분히 주무실수가 있었겠나 하는 생각에 무척 애잔하고 슬퍼진다.

 

집안에 우물이 만들어 졌을때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그전에는 마시고 밥하는 물도 동네앞 공동우물이나 학교의 우물을 길어다가 썻다. 그러니 물 길어오는 일도 중요한 일중의 하나였다. 그물로 밥하고 반찬하고 그릇 씻고, 우리 형제들 세수하고...이때 딸이 있었으면 품앗이를 해서 어머니가 물길러 가시면 딸은 그사이 밥과 반찬을 할텐데...

 

세끼 밥을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만들어서 식구대로 퍼고, 아궁이에 불이 있는 동안에 반찬을 만들고 다른 조그만 솥에서는 국을 만들고, 상을 펴서 숟가락 젓가락까지 다 올려 장만해 놓고서는 밥상 들고 가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제일 늦께 밥상 머리에 와서는 조금 드시는 듯 하시다가 이내 숭늉을 가지러 나가신다. 나중에 우리형제들이 철이 들면서 밥상을 들고 치우면서 가끔은 숭늉을 떠오기도 했었지만,,,대부분의 일들을 어머니 혼자서 다 하셨다. 이때 딸이 있었으면 수고로움을 들어드릴수가 있었을 텐데...

전기밥솥은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라

 

그저 딸이 있었으면 당신 일을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지금에사 느낄수가 있다니).

 

빨래거리를 한아름 이고 뒷 냇가에서 빨래를 할랴면 동네 아주머니들과 수다를 떨면서 빨래를 하다가도 옆집 아줌마의 딸이 와서 빨래를 하고 있으면 나(당신)도 딸이 하나 있었으면 좋으련만...

세탁기는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라.

 

들일을 하시다가 해가 뉘엇뉘엇하면 아픈 허리를 펴면서 저녁 밥 하러 아픈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신다. 식구들의 밥을 할 사람이 당신밖에 없음에 대한 서글픔이...집에 들어가 손발을 씻고 딸이 해놓은 밥을 먹으면(드시면) 얼마나 좋으련만...

이때 딸이 있었으면 저녁밥 해놓고 기다리겠지 하는 뿌듯한 상상도 못하시고...

 

5일장 시장에 가셨다가 갈치, 고등어 등 장거리를 보시고 머리에 이고 십리길 꼬부랑길을 돌아서 집에 오시면 이웃집에 부탁한 찬거리를 우리더러 나누어 주라 하시고는 이내 저녁밥을 하신다. 우리는 거저 어머니의 수고로움은 알지도 못하고 장에 갔다 오셨으니 갈치나 고등어 반찬이 올라오는 것만 기다린다. 정말 아들다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때 딸이 있었으면 저녁밥을 해놓고 기다릴텐데... 

 

언젠가 어머니께서 이제 밥하기가 정말 싫으시다고 몇차례고 하신적이 있다. 형제들 모두 말을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어머니의 심정 여자의 심정을 재빠르게 이해를 못하는 남정네들인 탓이다.

이때도 눈치빠른 딸이 있었으면 엄마 내가 도와줄께 한마니면 어머니의 탄식은 반으로 줄었으리라...

 

어머니의 그 많은 일들을 아들들은 도와드리지도 못할 뿐더러 그 마음도 헤아리지도 못하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모두 결혼해서 각자 살림을 한다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하고서....

 

전기밥솥도 전자렌지도 세탁기도 냉장고도 김치냉장고도 없던 시절을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