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왜 태종대 전망대에서 깊은 회상에 젖었을까?
부산에서 근무하던 시절이다.
1994년이나 1995년 무렵인가 보다.
아마 내가 과장으로 승진하고 나서 아버지께서
개금동의 주공아파트로 오셨다.
축하겸 여기저기 구경하시기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취향에 겸사겸사 오신 것이다.
어머니와 같이 오시지 않고 아마도 혼자 오신거 같다.
그래서 대우자동차에서 생산하던 르망 차를 몰고
아내와 그 당시 개포초등학교를 다니던 종무와 같이
영도 태종대를 갔다.
태종대 일주도로 사이 전망대에서 차를 주차하고
태종대 앞바다를 바라 보면서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아내와 나는 사진찍기에 바쁜데
아버지께서는 먼바다를 한참을 응시하시곤...사진 찍자는 재촉에
사진찍기에 응해 주고는 또다시 앞머리에 조금 남은 머리카락이 쎈 바닷바람에 흩날림에도 아랑곳 없이
바다를 한참 응시를 하시다
"저 오륙도를 돌아서 (군 수송선)배를 타고 일본을 갔다"고...
그렇게 짧게 말씀만 하셨다.
그리곤 한참을 말씀이 없어시다가,
"진해에서 훈련받고 부산에서 대기하다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부산에서 배를 띄우면 엔진없이도 배가 흘러가는 곳이 일본 시모노세끼다"
그리고는 태종대 등대를 구경하고자 급히 내려가면서 더이상 이야기가 없으셨다.
동행하시면서 한참을 말없이 그냥 따라오기만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어디 자리에 앉아서 안주와 술을 마련하고서 한참을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싶고
그러면서 그당시의 비감한 회상에 젖고 그러고 싶으셨으리라...
그때는 깊이 생각하지를 못했다.
뭘 의미하는지,,,다만 아버지께서 몇십년만에 추억에 잠기시나 하고 짐작만 했었다.
그 짐작이...그때 젖어들었던 아버지의 추억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1943년경일 것이다.
진해 (일본군)해군기지에서 6개월 훈련을 마치고
부산 하얄리아부대(그 당시에는 일본군 부대)에서 약 한달을 대기하다가
시모노세끼로 배를 타고 가셨다.
이것은 아버지 친구분한테 전해 들은 이야기다.
배를 탔다는 표현은 여기에서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대동아전쟁의 전쟁터로 떠난 것이다.
그때의 심정이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부모님, 형제들과는 제대로 이별인사라도 했을까
가면 살아서 돌아오기나 할지...
오직 희망이라면 살아돌아오는 것일뿐
무슨 거창한 장래의 포부를 품을 여유가 어디 있었겠나...
요즘 젊은이들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소위 자대 배치를 받는 기분과 같을까
전방으로 가지 말아야 할텐데, 강원도 인제 양양으로 가지 말아야 할텐데...와 같을까
아마도 비교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살아 돌아올수 있을까 하는
긴장과 불안감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그때 왜 깊이 있게 대화를 해서 아버지의 속내를 후련하게 털어내게 하시고 위로를 해 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
그것은 바로 대동아전쟁, 제2차세계대전의 전장터로 가는 뱃길이다.
일본에 가서 다시 부대 배치를 받아서 중국으로 만주로 동남아의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으로
뿔뿔히 흩어진다. 거기서 운명이 갈리는데, 즐거웠을까? 배타는 호기심이나 일본을 간다는 즐거움이 있었을까?
긴장과 불안이 가슴깊이 내려 앉고 바다를 건너갔을 것이다.
아버지는 징병 1기이고, 해군 육전대(해병대) 소속이다. 그래서 진해 일본 해군기지에서 훈련을 받았다.
다행인 것은 훈련 성적이 좋아서 아버지는 항공비 정비특기를 받았다고 한다.
육전대라면 대개 동남아로 갔을께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필리핀 밀림을 헤치면서 미군, 영국군들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상처를 입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아니면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감시병으로 있다가 종전이후
포로가 아닌 전범으로 몰려서 처벌을 받았을지도....
인생은 리바이벌이 안된다지만
만약에 다른 곳으로 배치를 받았으면 과연 우리가 태어나기라도
했을 것인가?
항공기 정비특기르 받고서 가고시마로 가서
몽끼, 스패나 등으로 머리를 맞으면서 배웠단다.
어찌보면 전장터보다 사치스럽고 행복한 군 생활이었으리라...
그러다 미군의 본토 공격을 받으면서,
미군의 B-29기가 맨 먼저 공격하는 곳은
당연히 방위산업체와 군사시설이니
아버지께서 복무하는 가고시마 군부대도 당연히 공격의 대상이었으리라
특히나 항공기가 있고 전함이 있는 곳이니
공격대상에서 제1번이었으리라...
중국으로, 동남아로 무기와 총은 다 나가고
본토 부대에서 죽창으로 경계근무를 서다가
B-29기의 폭탄 공습을 받고...
무서워 꼼짝을 못하고 죽창을 들고 꼳꼳히 서 있기만 하였다고...
바로 앞 바위밑에 기어들면 살 것 같은데...
'오금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이때 쓰기 위해 만들어 졌나보다
다행스럽게 그 당시의 폭탄은 지금처럼 위력이 세지 않아서
아버지를 비켜서 다른 곳에 떨어지고 수직으로 폭발음을 일으키면서 여기저기서 터지고
아버지께서는 천만 다행으로 무사하셨다고...
무사하신 것이 다행이 아니고, 그당시 아버지의 마음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하여 미군이 대규모의 비행기로 일본 본토 공급이 있었으니까
대략 22세 무렵이었으리라.
청년이지만 어린 마음인데, "아!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 왜에 뭔 생각이 들었을까
고향의 부모님과 형제들 친구들을 생각했을까, 아마 이런 생각도 사치였으리라
정한수 떠놓고 아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할머니의 기도 덕분이 아니었을까
어머니가 우리 어릴때 장독대에 정한수 떠놓고 한없이 빌고 또 빌던 모습을 보고
추측을 할 뿐이다.
나는 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 6.25전쟁 통에 미군의 총부리 겨냥을 받고
놀라서 그 이후 돌아가셨다니...내가 태어나기 전 이므로
두번째의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셨다.
그리고 60이 훨씬 넘으셔서 의사가 말하기를
젊었을때에 몹시 놀라서 지금 연세가 드셔서 그 영향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그때 그 미군기의 공습으로 놀란 가슴이 지금 가슴이 두근거리고 혈압이 높아지고 그러는 거 같다고...담담하게
말씀을 하셨다.
글쓰는 지금 난 필리핀 수빅에 와 있다.
미 해군기지였던 곳이다.
미군이 필리핀을 재탈환하면서
마닐라만과 수빅만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그 흔적이 수빅만 바다 밑에서 건져올린 무기들에서 볼 수 있다.
그때 아버지께서 필리핀으로 오셨다면, 어딘가에서 전투를 하였을 것이거나
아니면 포로 감시병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시간 거리인 바탄에는 "죽음의 행진"이라는 행사를 매년 한다.
그때 그 참혹했던 것을 기억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미군과 필리핀 포로들이 식량과 물 공급도 없이 때약볕에 행군을 하다가
탈진과 배고픔과 태양열에 수많은 사망자가 나왔다고...
그러면서 일본군과 한국군을 같이 보고 있었다,
그때 일본군과 한국군이 나빴다고...
아마 필리핀 역사에서 그렇게 가르키나 보다
우리 회사의 필리핀 여직원은 몇차례나 이 이야기를 하였다.
마닐라에서 대학까지 나온 사람인데...
차근 차근 설명을 하였지, 한국도 필리핀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였고, 그때 한국인들은 강제로 끌려와서 그렇게
하였다고...우리도 일본을 그래서 싫어한다고...
이제는 이해하였을 것이다. 오직 그 여직원만...
나머지 대다수의 필리핀 사람들은 아직도 일본과 한국을 같이 미워하면서...
이때 아버지께서도 일본군에 끌려가서 죽지않고 다행히 살아서 돌아왔고
그래서 내가 태어났고
그리고 우리가 여기 필리핀 수빅에서 이렇게 만나서
같이 부대끼면서 근무하고...
서로의 오해를 풀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