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과 마산항 귀국
아버지 살아계셨을때, 어느해 이던가에
그 시와 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 내돈 도둑질한 사람을 창녕에서 봤어
그사람이 맞는거 같더라"
"아버지 지금 그 사람이 아버지 돈 훔쳐간 도둑이 맞다케도
그 사람이 인정하지도 않을 끼고 아무 방법이 없심더"
그렇게 아버지와의 그 대화는 두마디로 끝나고 말았다.
그때 대수롭지 않게 아버지에게 말 대답을 하고 그냥 지나쳤다게...
얼마나 한에 사무쳤을까? 하는 생각은 돌아가신지 1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사 아릿한 아픔과 죄송함과 아쉬움으로 떠 오른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귀국할 방법이 없어서 일본에서 몇개월을 기다리다
그해 11월경에 귀환병을 싫은 배가 일본 어딘가에서
마산항에 도착하였다.
고향 창녕으로 한달음에 가고 싶은 마음이야
하는수 없이 봉노방같은 여관에서
한 방에 십수명씩 나란히 누워자는 그런 방에서
하루를 지내야만 했다.
그날 그 방에서 유별나게 수선을 떨고 왁짜하던 두 사람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왁짜하게 떠드는지를 전혀 모르는 시골 청년인
20대 초반의 아버지께서 그 사람들이 쓰기꾼이라고 생각하기엔 경험이 너무 없고
또 "그런 사람 조심하라"는 그러한 정보를 알려줄 사람도 없었기에
베갯머리에 돈 보따리를 넣고 잠을 잤다.
젊은 나이에 배를 타고와서 얼마나 고달팠을까 그리고 깊은 잠에
아침에 일어나니 돈 보따리가 사라져버렸다.
그당시 시골에서 논을 댓 마지기 살 수 있는 돈이었다는데
아무리 주변을 뒤져도 찾을길이 없고
유달리 수선떨던 사람들은 저쪽 구석에 조용히 있고
혐의는 가지만 어떤 방법을 모르고
설사 안다 한들 해방의 어수선한 질서속에
뭘 어떻게 할 방법이나 있었을까
고향갈 차비도 없고 해서
그 사람들에게 차비라도 좀 달라고 하였더니
얼른 주더라고
빈털털이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얼마나 억울하고 허탈하였을까
논도 사고, 공부도 할 수 있는 돈이었는데
아버지의 부모님과 형님들께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였을까?
일본이 일으킨 대동아전쟁(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되는)의 발악속에
전쟁터에 징병이 되어서
목숨값으로 받은 돈인데
몽땅 털렸으니, 아! 얼마나 억울하셨으면
그 돈이 있었으면 젊은 나이에 좀더 공부를 할 수 있었을테고
(큰어머니의 말씀을 빌리면 비가 와서 마당의 곡식이 비에 젖어도 비 설겆이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공부만 하셨다고...)
그 후의 어머니와 신혼생활을 그렇게 어렵게 하지도
그리고 자식공부를 또 그렇게 힘들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후회와 원망이...얼마나 쌓여셨을까.
연세가 70이 넘으셔서 어딘가에서 그 사람들을 보았다고
이미 50년 가까이 흐른 뒤에
그 사람이 자백을 한들 어떡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또 어떻게 할까만
평생의 한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었으므로...넋두리로
우리에게 해방이지만
일본에선 종전이 되고
징집한 군대를 해산하고 각자 고향으로 돌려보내면서
그동안 지급하지 않았던 군인들의 급여를
지급하였다는데...
그 목숨값 피같은 돈을 마산 어느 봉노방 같은 여관에서
털렸으니...평생의 응어리로 남을 수 밖에
아! 슬프다.
글로나마 남겨서, 아버지의 유한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렸으면
하는 맘에서 기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