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

종전과 마산항 귀국

스티브황 2011. 12. 27. 15:54

아버지 살아계셨을때, 어느해 이던가에

그 시와 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 내돈 도둑질한 사람을 창녕에서 봤어

그사람이 맞는거 같더라"

"아버지 지금 그 사람이 아버지 돈 훔쳐간 도둑이 맞다케도

그 사람이 인정하지도 않을 끼고 아무 방법이 없심더"

그렇게 아버지와의 그 대화는 두마디로 끝나고 말았다.

 

그때 대수롭지 않게 아버지에게 말 대답을 하고 그냥 지나쳤다게...

얼마나 한에 사무쳤을까? 하는 생각은 돌아가신지 1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사 아릿한 아픔과 죄송함과 아쉬움으로 떠 오른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귀국할 방법이 없어서 일본에서 몇개월을 기다리다

그해 11월경에 귀환병을 싫은 배가 일본 어딘가에서

마산항에 도착하였다.

 

고향 창녕으로 한달음에 가고 싶은 마음이야

하는수 없이 봉노방같은 여관에서

한 방에 십수명씩 나란히 누워자는 그런 방에서

하루를 지내야만 했다.

 

그날 그 방에서 유별나게 수선을 떨고 왁짜하던 두 사람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왁짜하게 떠드는지를 전혀 모르는 시골 청년인

20대 초반의 아버지께서 그 사람들이 쓰기꾼이라고 생각하기엔 경험이 너무 없고

또 "그런 사람 조심하라"는 그러한 정보를 알려줄 사람도 없었기에

베갯머리에 돈 보따리를 넣고 잠을 잤다.

 

젊은 나이에 배를 타고와서 얼마나 고달팠을까 그리고 깊은 잠에

아침에 일어나니 돈 보따리가 사라져버렸다.

그당시 시골에서 논을 댓 마지기 살 수 있는 돈이었다는데

아무리 주변을 뒤져도 찾을길이 없고

 

유달리 수선떨던 사람들은 저쪽 구석에 조용히 있고

혐의는 가지만 어떤 방법을 모르고

설사 안다 한들 해방의 어수선한 질서속에

뭘 어떻게  할 방법이나 있었을까

 

고향갈 차비도 없고 해서

그 사람들에게 차비라도 좀 달라고 하였더니

얼른 주더라고

 

빈털털이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얼마나 억울하고 허탈하였을까

논도 사고, 공부도 할 수 있는 돈이었는데

아버지의 부모님과 형님들께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였을까?

 

일본이 일으킨 대동아전쟁(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되는)의 발악속에

전쟁터에 징병이 되어서

목숨값으로 받은 돈인데

몽땅 털렸으니, 아! 얼마나 억울하셨으면

 

그 돈이 있었으면 젊은 나이에 좀더 공부를 할 수 있었을테고

(큰어머니의 말씀을 빌리면 비가 와서 마당의 곡식이 비에 젖어도 비 설겆이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공부만 하셨다고...)

그 후의 어머니와 신혼생활을 그렇게 어렵게 하지도 

그리고 자식공부를 또 그렇게 힘들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후회와 원망이...얼마나 쌓여셨을까. 

 

연세가 70이 넘으셔서 어딘가에서 그 사람들을 보았다고

이미 50년 가까이 흐른 뒤에

그 사람이 자백을 한들 어떡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또 어떻게 할까만

평생의 한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었으므로...넋두리로

 

우리에게 해방이지만

일본에선 종전이 되고

징집한 군대를 해산하고 각자 고향으로 돌려보내면서

그동안 지급하지 않았던 군인들의 급여를

지급하였다는데...

 

그 목숨값 피같은 돈을 마산 어느 봉노방 같은 여관에서

털렸으니...평생의 응어리로 남을 수 밖에

아! 슬프다.

글로나마 남겨서, 아버지의 유한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렸으면

하는 맘에서 기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