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을 옛날에서 보면...

우리의 장례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스티브황 2011. 12. 28. 13:09

어젯밤 11시경에 친구의 부친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새벽같이 문자메일이 왔는데

내일이 발인이란다.

 

3일장을 치러야 하고, 그래서 고인과 이승에서 작별하는 시간은

만 하루가 조금 넘는다.

너무 급하게 서두른다 싶다. 물론 각 집안의 사정에 따라 결정한 일이므로

간섭하거나 비난을 하고자 하는 일은 아니지만...

 

꼭 3일장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미리 장례절차를 준비하였다면

큰 무리는 없겠지만...

 

3일장이 대세로 된 것은 추측하건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 허례허식을 근절하고자

관혼상제를 간소화한테서 비롯된게 아닌가 싶다(좀더 확인을 해봐야 하겠지만)

특히나 상제의 경우 유교 법식에 따르면 너무 절차가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들고

시일이 많이 소요되므로, 간소한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서 정부에서 공무원들이 홍보를 하였고

그리고 그게 그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이치에 맞았기에 따랐고 

 

그 시절 농업이 전체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업국가이고

농민들이 관혼상제에 지나치게 격식을 갖추다 빚을 지고 하므로

농촌경제를 건강하게 하고자 하였던 취지로 보인다.

 

3일장, 4일장, 5일장, 7일장...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서둘러 3일장을 꼭 치루어야 하는지.

각자 각 집안의 사정에 맞추어 하면 될 일이다.

 

과거 임금들은 몇개월 내지는 일 이년에 걸쳐서 장례(국상)를 치렀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사망시점부터 묘지터를 찾고 묘역을 조성하고

하는게 온통 사람의 힘으로 만 할 시절이므로 시간이 많이 걸릴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어염집도 마찬가지 이리라...

선산이 없는 경우 묘지를 구하고, 그리고 방향을 잡고 사람을 동원하여 묘터를 파고 그리고 주변을 조성하고

넉히 며칠은 걸리는 일이다.

갑자기 돈으로 인력을 사기가 어려워 각 마을마다 "초롱계"같은 장례품앗이를 만들어서

묘지 조성을 해주고 또 상여를 메서 운반도 해 주었다.

포크레인이 없던 시절, 차량이 없던 시절이라...

그 시절에 맞춘 알맞은 합리적인 협력 협동의 품앗이이었으리라

 

다음은 고인의 친척과 친구분들이 모여서

고인과 평소에 친분이 있던 분, 친척, 친구들에게 부고장을 돌리기 위하여

부고장을 만들고, 부고장을 보낼 상대방의 이름을 봉투에 적고

그리고 동네별로 묶어서 아이들을 시켜서 부고장을 집집마다 돌리게 하였다.

이 일도 2 ~ 3일은 족히 걸리게 된다.

요즘이야 신문에 내거나 휴대폰 문자메일로 보내면 그만일 정도로 간편하고

빨라졌지만...

 

그러면 가까이에 거주하는 문상객들은 장례절차에 맞추어 와서 곡을 하면서 문상을 하고

그 당시 멀리 떠나 있거나, 먼 곳에 거주하는 문상객이라면

걸어서 돈이 있다면 말을 타고 와서 문상을 하였으리라

 

그래서 장례절차(발인하여 봉문을 만드는 시점까지)를 마치고도

빈소를 차려서 문상객을 맞이하곤 하였다.

 

물론 고인을 기리기 위하여 빈소를 만들어서 아침 저녁으로 공양을 하고

곡을 하던 시절에 만들어 졌지만, 멀리서 또는 늦께오는 친척이나 문상객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설치였던 것이다.  

 

밤이면 마당이나 앞뜰에 장작불을 밝히고 문상객들이나

이웃들이 모여서 밤샘을 하게 된다.

이러한 밤샘 문화가 아마도 90년대까지 유지되었던 거 같다.

이유도 모르고...밤새 지켜주는게 이유는 모르지만 예의일 것 같아서

 

심지어 직장 상사의 집에 문상을 갔다가 밤 12시 이전에 다 돌아왔다고

부장께 보고를 하였더니 대노를 하시면서 다음날 모두가서 밤샘을 하라는 지시를

받고 모두들 부랴부랴 다시 가서 밤샘을 하였던 시절이 80년대 중반이었다.

지금 젊은이들이 생각하면, 밤샘은 왜 해야 하고 부장이 지시한다고 또 모두 따르고...아마 이해를 못할 것이다.

 

유래와 이유와 원인을 알려면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면 안다.

그래서야 아하! 하고 이해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를 못하고 다만, 뜯어 고쳐야 할 못된 잘못된 문화유산이라고 비난하고 매도만 할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해 왔다.

 

옛날에는 사람이 사망하면, 얼음도 없고 냉동시설도 없었던 시절이라

하루 이틀 지나면 시체에서 나오는 냄새가 점점 퍼지게 된다.

이 냄새를 산에 거주하는 산짐승들 특히 여유, 늑대 등이 잘 맡아서

상가를 찾아오게 된다. 그것도 밤 늦은 시간에 인적이 끊기면...

 

얼마나 무서울 것인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무지 슬프기도 하고 한편 앞으로 어떻게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까 두렵기도 한데

거기다 짐승들이 찾아와서는 문상이 아니라...얼마나 무서웠을까

 

뭔 짐승이 있다고 그래 하면 또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과 비원에도 담을 넘어서 호랑이가 침범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괄이 호랑이를 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궁궐을 침략하여

임금을 폐위시킬 정도로 산에 거주하는 짐승들이 많았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을 보호하고 상주들의 두려움을 들어드리고

산 짐승들의 방문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장작불를 밝혀서 밤을 새워 주던 장례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듣고보니 얼마나 아름다운 상부상조의 문화인가?

지금에사 그럴 필요가 없기에 밤샘문화는 거의 사라졌지만, 시대에 따라 사라졌지만...

배척하고 잘못된 문화라고 비난할 일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 시절을 이해한다면

그 시절에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당연함에서 합리적으로 만들어지고

이어져 오는 (장례)문화였으리라고 이해를 한다면 

역사의 깊이와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고

조상들을 이해하고 존경하고 그리고 그 문화 그 역사를 존중하게 될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