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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도자기의 역사

스티브황 2008. 5. 8. 18:20

 

 

중국도자기의 역사


중국〕 <전사(前史)> 중국의 도자기는 한국·일본·타이·베트남·캄보디아 등 주변 여러 나라의 도자기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항상 선구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중국에서는 토기·도기·자기를 포함하여 <도기>라고 부르고 있지만, 여기서는 토기를 제외한 도자기를 고찰한다. 중국에서 유약을 입힌 도자기는 은(殷)나라 중기, 즉 정주기(鄭州期)라고 불리는 BC15∼BC14세기경에 나타났다. 얇은 솔로 칠한 것 같은 시유도(施釉陶)이며, 1200℃의 고온에서 구어진 존형(尊形)·호형(壺形)·두형(豆形) 등의 도자기가 있으며, 기면(器面)에는 인문(印文)을 한 것이 많다. 은나라 후기인 안양기(安陽期)에는 회유도자기의 생산도 왕성해졌으며, 열효율이 좋은 가마에서 구워졌다. 안양기에는 백도(白陶)라는 고령토를 이용한 흰 경도(硬陶)로 만든 술잔과 항아리 등이 만들어졌으며, 기면에는 도철문과 기봉문(夔鳳紋) 등이 그려져 있어, 기형·문양은 청동기와 거의 같다. 서주(西周)시대에는 저장〔浙江〕·장쑤〔江蘇〕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유도(釉陶) 생산이 이루어져, 안후이성〔安徽省〕·툰시〔屯溪〕의 서주시대 유적에서는 전체에 유약을 고루 입힌 술잔·제기(祭器)·항아리 등이 출토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시기의 시유도를 자기에 가깝다고 하여 <원시자기(原始磁器)>라고 부른다. 강남지역에서는 회유도와 같이 기면에 깊게 스탬프상(狀)의 인문을 전면에 새겨 고온에서 구워낸 인문도(印文陶)가 발달하였으며(인문토기), 곧 인문경도의 기법과 회유도의 기법이 바탕이 되어 한대(漢代)의 유도로 발달해 간다. 화베이〔華北〕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는 뚜렷한 도자기의 발전은 볼 수 없으나, 이른바 방동도기, 방칠도기라고 불리는 동기(銅器)·칠기를 모방한 회도(灰陶)가 만들어졌다. 허베이성〔河北省〕 중산왕묘에서 출토된 흑칠조형존(黑漆鳥形尊)과 흑정(黑鼎)·흑칠호(黑漆壺) 등은 춘추전국시대 화베이의 대표적인 도자기이다. 또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연유도(鉛釉陶)가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 등에 전해지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한(漢)에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한나라에 들어와 도자기는 크게 발달했으며 다양한 각종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이른바 회도를 기본으로 한 회도가채(灰陶加彩)·회유도, 그리고 녹유(綠釉)나 갈유(褐釉) 등의 연유도 등이다. 근래 중국에서는 흡수율·유약·태토(胎土) 등 자기로서 필요한 조건을 충분히 갖춘 것이 후한(後漢)시대 초에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저장성의 상위〔上虞〕·치시〔慈溪〕·융자〔永嘉〕 등 후한시대 닝보〔寧波〕의 자기요(磁器窯)가 발굴되어, 결정이 부드러운 태토에 연속적인 스탬프 문양을 새기고 아름다운 투명유(透明釉)를 골고루 입힌 항아리와 꽃병 오련호(五連壺)·타호(唾壺)·벼루 등이 출토되고 있다. 가마의 형식도 용요(龍窯)의 형태이며, 삼국시대에 발달한 고월자(古越磁)의 선구적인 도자기가 기원 전·후에 완성되었다고 하는 점은 극히 중요하다. 삼국·양진(兩晉)·남북조(南北朝)시대는 화베이와 화난〔華南〕에서 독자적인 도자기 생산형태를 갖추었다. 우선 화난에서는 저장성의 항저우〔杭州〕를 중심으로 청자·흑유자(黑釉磁) 생산이 활발해졌으며, 특히 청자는 신정호(神亭壺)·호자(虎子)·양형기(羊形器)·반구호(盤口壺)·천계호(天鷄壺)·등(燈)·벼루·청자용(靑磁俑;인물·猪圈) 등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의 청자를 특히 <고월자>라고 부른다. 저장에서 고월자가 활발하게 제작되자 주변 여러 도요지(陶窯址)에서도 저장 고월자와 닮은 자기를 구워내게 되었다. 푸젠〔福建〕·광둥〔廣東〕·장시〔江西〕 등에서 볼 수 있는 이 시기의 청자는 고월자를 모방한 것이고, 저장성의 상위요와 닝보요 등에서 만들어진 좁은 의미의 고월자와는 별개의 것이다. 또 저장성의 더칭요〔德淸窯〕에서는 흑유자를 중심으로 생산하고 있었다. 남조시대에는 화베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되는 그릇도 생산되어 남·북조의 교류가 빈번하였음을 추측케 한다. 화베이는 화난에 비하여 자기의 생산이 상당히 뒤떨어져 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자기생산이 시작되었다. 화난과 달리 녹유와 갈유 등의 연유도가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5세기 말경의 사마금용묘(司馬金龍墓;山西省 大同市 소재)로부터 녹유와 갈유를 입힌 말·무인 등의 토용(土俑)이 출토되고 있다. 북위(北魏)·북제(北齊)시대에는 화베이에서도 자기가 생산되어, 허베이·산시〔山西〕의 북위묘에서는 청자연병형 (靑磁蓮倂形)의 대존(大尊)과 황유자(黃釉磁)가 발굴되고 있다. 또 화난의 남조자기에는 기면장식이 적은 데 반하여, 화베이의 북위묘에서 발견되는 황유자·청자 등은 첩화장식(貼花裝飾)이 어지럽게 붙어 있는 것도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북제시대에 화베이 여러 지역에서는 백자도 생산되었는데 허난성〔河南省〕 범수묘(范粹墓)와 허난성 이운묘(李雲墓)에서는 백자녹채병(白磁緣彩甁)과 황유녹채육이호(黃釉綠彩六耳壺) 등이 발견되었으며, 당(唐)의 삼채도(三彩陶)의 초기적인 것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수(隋)·당(唐)> 수·당 시대에는 청자·백자·흑유자 등의 자기류와 함께, 이른바 당삼채(唐三彩)라고 불리는 연유도 등 송대(宋代) 이후에도 계속되는 각종 중국 도자기가 모두 나타나게된다. 당시의 도요지로는 웨저우요〔越州窯〕·웨양〔岳陽〕·싱저우〔刑州〕 등지가 유명하다. 도요지에서는 은과 눈〔雪〕에 비유될 만큼 완벽한 백자의 그릇과 항아리가 출토되어 당대(唐代)에 백자가 완성된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삼채는 인물과 동물, 가옥과 각종 그릇이 모두 명기(明器)라고 일컬어지는 부장품(副葬品)이고, 남유(藍釉)나 녹유·갈유·백유(白釉)를 단독으로 또는 2가지 이상의 유약을 섞어 완성된 연유도로, 허난성 궁현〔鞏縣〕 도요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당삼채는 8세기 초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당나라 중기에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당나라 말기·송대에 삼채로서 계승되었다.


<송(宋)·원(元)> 당대 말기와 오대(五代)에 웨저우요에서 <비색청자>라는 양질의 청자를 만들어 내어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하나인 오월(吳越)의 전씨왕실(錢氏王室)에 <공자(貢瓷)>로서 전씨의 보호 아래 관요적(官窯的) 성격을 띤 가마로 되었다. 또 이 때 웨저우요의 청자는 중요한 수출품으로서 한국·일본·동남아시아·서아시아 등지에 널리 수출되었다. 중국에서 도자기가 수출품으로 널리 이용된 것은 이 때부터이며, 저장성의 닝보에 시박사(市舶司)가 설치되었다. 북송(北宋) 후기에는 저장성 남부의 룽취안요〔龍泉窯〕가 청자생산의 중심지가 되어, 송·원·명대(明代)의 약 500년간 활발하게 생산하였다. 오대에는 장시성의 징더전요〔景德鎭窯〕에서 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11·12세기경에는 청백자(靑白磁)로 불리는 푸른색을 띤 백자가 후텐요〔湖田窯〕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룽취안요의 청자와 함께 중요한 무역품이 되었다. 화난의 여러 지역에서도 이 때 여러 가지 도자기가 완성되어, 무역품으로 동아시아·서아시아·한국 등지에 수출되었다. 주요 품목으로서, 푸젠성에는 젠요〔建窯〕의 천목(天目), 안시요〔安溪窯〕의 청자, 취안저우요〔泉州窯〕의 황유철화(黃釉鐵畵) 등이 있다. 장시성에는 징더전요 이외에도 지저우요〔吉州窯〕의 천목·백유철화·녹유 등이 있다. 화베이의 여러 도요지에서도 송대에는 활발한 도자기 생산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허베이성의 딩요〔定窯〕·츠저우요〔磁州窯〕, 산시성〔陝西省〕의 야오저우요〔耀州窯〕, 허난성의 쥔요〔鈞窯〕가 유명하다. 송대 화베이의 주요한 도요지에서의 도자기 생산은 당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본격적인 도자기 생산은 북송 이후부터였다. 송대에는 위에서 기술한 화베이·화난의 도요지 이외에도 루요〔汝窯〕·게요〔哥窯〕·둥요〔東窯〕 등의 관요청자요(官窯靑磁窯)가 존재한 것도 중요하다. 송대 관요에서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청자가 유럽·중국·미국 등지에 전세(傳世)되었으며, 도요지의 위치는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다. 원대(元代) 징더전요에서 백자에 유약을 입히기 전에 코발트(靑料)로 그림을 그리고 투명유를 입힌 청화(靑華)가 발명되어 징더전요는 중국 도자기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청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① 츠저우요·지저우요 등지의 철화채도(鐵畵彩陶)의 영향 ② 서아시아의 이슬람 도기의 영향 ③ 징더전요의 독자적인 발전 등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 코발트를 정색재(呈色材)로 사용한 청화와 함께, 원대에는 구리를 정색재로 사용한 유이홍(釉裏紅)도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데, 붉은색의 홍유(紅釉)로 그림을 그린 독특한 도자기이다. 중국 국내에서는 이러한 청화·유이홍은 일상적인 기명(器皿)과 함께 도교사원(道敎寺院)의 제사구로도 사용되었으며, 인도·이란·터키 등의 이슬람세계에 무역품으로 대량 수출되어, 이란 사파비왕조의 고지(故地)인 아르데발과 오스만투르크의 토프카프궁전에 원대 청화의 우수한 제품이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명(明)·청(淸)> 명대의 도자기는 징더전요를 중심으로, 게다가 선덕제(宣德帝) 때 어기창(御器廠)이 설치되어, 징더전요는 정부가 관리하게 되고 제품의 생산량이 엄격히 규제되었다. 그 결과 청화·적화·색화(色畵) 등에서 흘륭한 자기를 완성하여, 중국 도자기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영락제(永樂帝)∼선덕제(1403∼35) 시기에는 뛰어난 청화도자기가 많은데, 원대의 힘찬 청화와는 다르게 잘 다듬어지고 세련된 작품이 많다. 명대 후기인 가정(嘉靖)·만력기(萬曆期;1522∼1619)에 징더전요의 생산이 절정에 이르러 어기창에 대한 생산주문이 격증, 어기창에서는 일부를 민요(民窯)에 위탁하는 <관탑민소제(官塔民燒制)>가 일반화되었다. 이 결과 어기창은 한 때, 문양이나 그림만을 그리는 금요(錦窯)가 된 적도 있어, 어기창의 쇠퇴를 초래하게 되었다. 반면 징더전에서는 민요가 활발하게 자기를 제작하게 되어, 고청화(古靑華)·상서(祥瑞)·오수적화(吳須赤畵)·남경적화(南京赤畵) 등의 다도(茶陶)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청나라 초기 징더전요에서는 민요가 활발하게 도자기를 생산하여 동남아시아·유럽 여러 나라에까지도 자기를 수출하였으며, 유럽의 제후들의 궁전 장식과 일상용품으로서 널리 이용되었다. 제4대 강희제(康熙帝;1662∼1722) 때 어기창이 부활되었고, 징더전요에서는 모든 복잡한 기법을 구사한 정교한 도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청화, 색화를 덧붙여 유럽의 무선칠보(無線七寶) 기법을 응용한 법랑채(琺瑯彩)·양채(洋彩)·분채(粉彩) 등의 색화자기(色畵磁器)가 생산되었으며, 특히 분채는 청조(淸朝) 징더전요의 주류가 되어 (고월헌(古月軒)>이라는 매우 치밀하고 정교한 색화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옹정(擁正)·건륭(乾隆)시대(1723∼95)는 징더전요의 전성기로 어기창의 활동은 눈부셨다. 건륭 말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징더전요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등도 발생하여 어기창의 활동은 점차 쇠퇴하였다

출처 : 모던나르
글쓴이 : 아고구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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