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야, 이 솥 가지고 성근이 데리고 살아봐라. 내 가실하고 나면 애 밥 해줄 솥하고 밥그릇 몇 개 사주께" 손위 동시의 말이었다. 아버지께서 결혼 후 제대로 신혼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큰아들과 어머니를 두고 다시 군대를 가셨다. 첫번째는 일제 징병1기로 갔다가 일본군대(가고시마 해군육전대)에서 해방을 맞이하셨다. 군대가신 후 "남편이 못 벌면 여자라도 벌어야 한다"는 큰어머니 말씀에 머리에 이고 이동네 저동네를 돌아다니는 행상을 하셨다. 마른오징어, 여성들의 소품등이다.
큰집 방 한칸에 모자가 지내다, 둘째큰집의 작은방으로 이사를 했다. 말이 이사지 밥 끓여먹을 솥도 없었단다. 그 끝에 세째 손위동서가 위로하면서 가실 끝나면 솥을 사 주겠다고 하셨는데 영원히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어 버렸다. 그해 추석 명절 음식을 장만하고 주무시다 갑자기 돌아가셔 버렸다. 그래서 추석날 밤에 세째큰어머니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작은방은 흙바닥에 짚이 깔려 있었단다. 그 서러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으신지 서러운 옛날이야기 한 줄에 꼭 나온다.
돌아가실 때 세째 큰동시의 둘째아들이 젖먹이였다. 아침만 되면 어머니께 젖달라고 대청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 후 큰아들과 조카, 두 얘를 젖먹여 키웠다. 이름이 근식이 형이다. 커서도 체구가 왜소했다. 그래도 여전히 볏짚 깔아놓은 방에서 잠을 잤다. 시아주버니 누구도 볏짚바닥을 외면하더란다. 다들 그렇게 자라서 당연하다 생각했는지 아니면 종이라는 물자가 귀하고 돈이 들어서 그런지 또 아니면 제수씨방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숙맥이어서 그런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나중에 세째시아주버니 새장가들었다. 밥솥을 돌려달라고 해서 돌려주고 서러워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