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께서는 1980년대 후반에 돌아가셨다.
아마 신용보증기금 부평지점에 근무하던 1987년 무렵이 아닌가 싶다.
큰아버지께서 내가 중학교 때 쯤인가 아니면 고등학교 쯤인가에...
시골버스 정류장에서 큰아버지와 내가 각기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버스표 파는 가게집 아저씨에게 "이조카(바로 나)가 내 막내동생의 아들인데
자식들은 많지 고생이 많다"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용돈을 주셨다.
그리고 어느날 시골집에 혼자 있는데
큰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거 아버지 해방후에 경찰서에 끌려가서
엄청 맞았다.
그래서 내가 구해볼려고 경찰서 찾아가고 그랬다. 그래서 간신히 풀려 났다"고 하셨다.
그때 보도연맹이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옛날 이야기 끝에
6.25 나던해에 "너거 아버지와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친정에서 살고 있는데(1960년대까지 결혼을 하고도 일년 가량은 신부가 친정에서 살고
신랑은 신부집을 오가면서 지냈다) 전쟁이 터졌다"
"그때 소문에 보도연맹은 다 죽인다는 소문이 퍼졌고
외할머니(어머니의 어머니)는 아이구! 우리 사위 죽는다고 난리치고
울고 하셨다"고 하셨다.
그때 어머니 친정식구들은 난리를 피해서 청도 골짜기로 피신을 하셨는데
전쟁통에 연락은 되지 않고 그냥 걱정만 태산같이 하셨다 면서
이때 아버지도 소문을 듣고 급히 피신을 하신 모양인데...
돌아가실때까지 "보도연맹"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으셨다.
다만 짐작에 6.25.전쟁 이후에도 극심한 이념대립과 남북대립으로
빨갱이라면 무조건 처벌을 받고 그 가족들은 엄청 고통을 당하던 시절이라
함부로 이야기 잘 못하면 자식들에게도 불리한 영향이 있을까봐
그런 말못할 고통을 당하고도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으신 것 같다.
숨기신 것이다. 자식들이 대한민국에서 떳떳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그뒤 내가 항공과학고(구;공군기술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시험을 치고나서
경찰인가 보안대에서신원조회를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아마도 아버지께서 육군에서 제대하였다는 것을 말씀하신 모양이다.
이때도 뭔가를 숨기시고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는 느낌이 조금 들었었다.
그게 바로 보도연맹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다.
이후 바로밑 동생이 사관학교에 합격을 하고나서
신원조회가 또 나왔는데 이때는 내가 공군중사로
레이다기지와 공군본부 상황실에서 근무한다고 하였다고 하셨다.
최근에사 이념대립의 우열이 거의 끝나고
그리고 그 시절의 많이 사람들이 돌아가시고, 화해와 용서의 분위기가 감돌면서
그러면서 잠겨있던 금기시하던 이야기와 사실들이 서서히 언론에 의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보도연맹 사건도 기사화 되고 TV의 다큐에서도 다루어진 것을 보앗다.
전쟁이 터지면서 정부(어느부서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경찰을 담당하던 내무부나 경찰국 같은데서)는
긴급히 피신을 하면서 문서를 경찰서에 보내기를...
보도연맹을 모아서 사살하라고
명령을 받은 많은 경찰서에서는 발 빠르게 보도연맹을 밤에 소집하여 트럭에 싣고 산속이나 바닷가로 가서
쏘아 죽이거나 바다에 빠트려 죽였다고 한다.
경찰력이 모자라는 경찰서에선 군대의 지원을 받아서 사살하였다고도 하고
명령을 받았으되 그대로 실천한 경찰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경찰서는 미루다 풀어주기도 하고
어떤 경찰은 아예 소집도 하지 않고...
어떤 경찰서장(김해)은 잘못된 것을 알고 보도연맹원들을 각자 알아서 피신하라고 풀어주기도 하고
내 고향 창녕경찰서에서는 어떻게 하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아버지는 살아계셨고, 그리고 창녕에서 보도연맹으로 죽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천에 만에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태어나기라도 하였겠는가 싶다.
사람 목숨이 그렇게 엇갈리는게 전쟁이던가
다들 제정신이 아닌게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함에 모두들 이성을 잃고
광기를 부린 광기의 세상에서...
누구도 죽고 누구는 살아남고...
이게 전쟁이고
이게 광기이던가
이후 아버지는 창녕 공비토벌 작전인 화왕산 공비토벌에 참여하였으며
그공을 인정받아
김영삼 정권시절에 6.25참전 용사증이 나왔고
아버지 돌아가셨을때는 장례비 10만원이 나왔다.
지금 참전용사들은 살아계시다면 아마도 몇만원의 연금도 주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후 아버지는 다시 군대에 입대를 하셨다.
두번 군입대를 한 셈이다.
1943년 제2차세계대전의 와중에 일본군 징병 1기로 약 2년간의 군생활을 하셨고
이때 나이는 젊고도 젊은 20세의 나이이셨고...
1951년인가 1952년 경 인가에는 28 ~ 29살의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를 하셨다.
일제때와 마찬가지로 육군 항공대의 정비사로 근무를 하셨다는 것과
강릉 비행장과 부천의 어느부대(지금의 9공수부대 자리?)에서 근무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생이 9공수 지역대장(소령)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아버지께서 그시절을 회상하면서
하신 말씀인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 늦은 나이에 어떤이는 그 나이에 영관급과 별을 달고 있었는데...
큰 형님이 51년생이므로 아마도 어머니가 큰형을 낳았거나 임신중에 다시 입대를 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입대하여야 하는 의무입대였는지 아니면
자원입대였는지는 아직도 나는 모르고 있다.
그후 54년생인 둘째형님이 태어나고 난 뒤 제대를 하였다니
아마도 55년경에 제대를 하신 모양이다.
그러니 내가 태어나기 약 2년전에 제대를 하신 것이다.
그리고 고향 시골에 정착을 하셨고
1998년 5월 돌아가실때까지 아버지 형제분들과 고향에 함께 사셨다.
나는 아버지의 역사를 알고 싶다
두번이나 전쟁을 겪고 극심한 이념대립 속에서
어떻게 살아나셨는지...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자 개인판이다.
복원을 해서 조카들과 손자녀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남기고 싶다.
나라의 비참한 역사속에 개인의 역사가 어떻게 굴절이 되고
비참해 지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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