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

아버지 형제분들이 꿈꾸던 이상향은 무엇이었을까?

스티브황 2011. 7. 29. 16:37

초등학교 다닐 무렵, 읍내에 사시던 당숙의 가족들이 우리동네로 이사를 왔다.

이해하기 힘들었던게, 그당시 읍내는 적어도 나와 우리형제들에게는 가장 번화한 도시였던 셈이다.

그런데 그 화려한 도시(읍내)를 뒤로 두고 걸어서 한 시간 남짓 거리인 시골로 이사를 왔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숙네 집(이하 "아제집")에 갈려면 읍내 시장거리를 지나다 어느 골목으로 빠져서 서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동네 당산나무가 나오는

"술정리"라는 마을이다. 불과 시장에서 5분 거리의 도시인 셈이다.

큰아버지들(백부, 중백부, 숙부 모두를 일컬어서)은 우리동네에 큰아버지 형제분들 밖에서 없어서

외로움을 많이 느끼지 않았나 하는..

예로부터 조상들의 무덤이 뒷터와 이곳 저곳에 많이 산재해 있고

주위 어른들이 원래 이땅은 '황씨들' 땅이라고 하고, 기록도 있다는데...

그런데 정작 집안 친척은 아버지 형제분들이 전부이고

아버지의 사촌 두분은 읍내에서 사시고...

조상들의 무덤은 연연히 이어오는데 정작 후손들이 없으니

후손을 늘리고자 하는 욕심 내지는 바램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다른 큰 마을의 집성촌처럼 한마을을 일가로 이루어서 살고 싶었던게 아니었을까...

 

적어도 조선시대 500년을 이어오면서 줄곳 생업은 농경사회를 바탕으로 하고 사상(이상)은 유교적 도덕사회를 이루는 것이

이상향으로 꼽아왔다.

 

중앙정부에서 고관대작을 하다가도 벼슬을 그만두면 고향으로 내려가서 후학을 양성하는게 당연한 미덕이었다.

서애 유성용의 하회마을이 그러하고

부산의 동래정씨 마을이 그러하고....

 

유학에 학식이 높은 어른을 둘러싼 일가들이 집성촌을 이루면서 상부상조하고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지키고 그리고 은근히 다른 성씨와 비교하여

뽑내면서 살아가는게 보람이자 당당함이자 울타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형제분들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시대역행적인 생각이었다.

정작 아버지 형제분들이 전후 베이비붐의 영향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영아사망율의 현저한 감소로

적어도 한 가정에 5명이상의 형제자매를 두고

우리집의 경우 7남매를 두었는데도...

 

60년대 후반부터 불어닥친 새마을 운동과 경제개발과 도시의 산업화 과정에서

어렵사리 많이 키워놓은 조카와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도회지로 나가 버렸으니...

유교적 도덕사회와 농경사회에 기반을 둔 집성촌의 꿈은 산산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도 농촌에 가면 그나마 각 집안의 큰아들들이 고향을 지키고 있어서

나름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사촌과 조카들을 명절때 볼 수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명절에는 같이 차례를 지내고...

벌초도 하고...

시사(묘사)를 지내기도 하고...

 

사촌형님들의 한숨은, 이제 이런일도 우리대가 끝이지 누가 하겠냐는 것이다.